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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스페인어와 나(EL ESPAÑOL Y YO)

3.스페인어와 나(EL ESPAÑOL Y YO)

장선영(55학번, 전 한국외대교수)

-우울했던 고교 시절-

스페인어와 나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워진 것은 1953년 11월, 내가

고교 2학년 때였다. 1953년이면 휴전 협정이 체결되던 해였다. 상세히 말해서 1953년 7월 27일이였다. 이 날을 기해서 3년 동안 한반도를 포연(humo de canon)으로 뒤덮었던 동족상잔의 비극(tragedia fratricida)이 종식되었다. 따라서 그 동안 남한 전역을 뒤흔들었던 휴전 반대 함성이 마치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함성)

이 함성은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승만 대통령이 비장한 어조로 “북진통일(unificar marchando al norte)!”

을 부르짖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터뜨린 것이었다. 각계각층 단체들이 총궐기했다. 대학생들은 물론, 고등학교 학생들도 1학기초부터 공부고 뭐고 다 팽개치고 교문 밖으로 뛰쳐 갔다. 그리고 목청껏 외쳤다. “휴전 결사반대(nos oponemos al Armisticio a la muerte)!” 여학생들 중에는 어찌나 악을 썼던지 그만 탈진해서 기절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나의 반우(compañero de clase) 유 완빈 군(당시 서울특별시 고등학교 학도 호국단 총운영위원장)은 미군 부대 앞에서 미군 병사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우리가 휴전을 반대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설명해서 그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그 이튿날 연합신문은 그의 영웅적인 활약을 크게 보도했다.) 내가 후에 영어를 포기하고 스페인어를 택했던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

한편, 이승만 박사는 이승만 박사대로 휴전을 강행하려는 미국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특유한 노인성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를 방문한 미군 장성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어깨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면서 말했다. 물론 문법에 맞는 영어로...., “휴전을 찬성하는 장군들은 이제부터는 별 볼 일이 없습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휴전 협정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의 양 어깨에 붙어 있던 견장(hombrera)을 끝내 떼어 내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IKE(아이젠하워의 애칭인데 <I like Eisenhower>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바, 그는 1952년 대통령 선거때 이 애칭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음)는 그 때 이미 군복을 벗고 신사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어떤 어른이시더냐! 고집불통의 78세 노인이 아니시더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고 이 대통령은 비록 IKE의 어깨로부터 견장(hombrera)을 떼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넥타이를 움켜쥐고 놓지를 않았다. 그만 IKE는 부지중 “아이크!” 소리를, 아니 “아이구!” 소리를 냈다. 결국 그는 휴전만 묵인해 주면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억수’로 해주겠노라고 약속해야만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왕 내친 김에 이 대통령의 두둑한 뱃심에 대해 또 다른 재미난 일화를 소개하겠다. 1953년 6월 포로 교환 협정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이 대통령은 반공 포로들을 단독으로 석방했다. 이 뉴스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처칠은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랬던지 그만 그의 통통한 볼을 베었다나, 어쨌다나, (처칠은 적극적으로 휴전을 지지 했었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제2차대전(La Segunda Guerra Mundial)이 배출한 이 두 영웅을 보기 좋게 넉다운 시켰다. 또 믿거나 말거나.....,

전쟁이 끝났다. 이제부터 복구 사업에 온 국민이 팔을 걷어붙이고 전력투구 (echar la bola con toda la fuerza)해야만 했다. 물론 학생들도 복구 사업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복구 사업은 어디까지나 공부에 열중하는 거였다. 전시 중에도 마을 정자나무 밑에 칠판을 갖다놓고 수업을 하던 우리 민족의 학구열이 아니었더냐! (당시 많은 학교 건물들이 국군이나 UN군의 병사(campamento militar)로 사용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 때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청개구리 한 두명 씩은 꼭 섞여있는 법, 바로 내가 그런 청개구리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삽을 들고 일하는 복구 사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학생들의 본분인 기본 의무인 공부에도 열중하지 않았다. 매일 학교에는 출근했지만 수업은 건성으로 들었다. 게다가 이따금씩 엉뚱한(extravagante) 소릴 해서 선생님을 당혹케 (desconcertado)하고 동시에 반우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소설(novela)이 무엇인가에 대해 열심히 말씀하고 계시는데, 나는 느닷없이 선생님의 입에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선생님! 소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끝내시고, 이제부터는 대설에 대해서 말씀 좀 해 주십시요.” 나의 이 뚱딴지 같은 소리(bobadas)에 순간 교실 안은 뜨거운 물 대신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그 아까운 분필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장선영, 너 이리 좀 나와!” 평소와는 달리 아이들은 웃지를 않고 긴장된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교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 나는 당당했다. 처형장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는 안중근의사처럼...., 그 이유는 나의 그런 발언은 선생님을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문학적 소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시 김내성(1909-1957)이라는 인기 작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주로 [마인(hombre diablo)]같은 탐정소설을 썼는데, 나중에 청춘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연애소설가로 변신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4부작(cuatrilogia) [청춘극장(El Teatro de la Juventud)]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성격이 호탕한 젊은이가 소설을 쓰는 얌전한 중학교 동창에게

“야, 사내 자식이 이왕 글을 쓰려면 소설 말고 대설을 써야 될게 아니냐! 쪼잔하게 소설이 뭐냐?”

이렇게 면박을 주면서 껄껄 웃는다. 바로 이 대목이 한창 문학작품에 심취해 있던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그런 무례하고 버릇없는 질문을 드린 것이다.

선생님은 약간 얼이 빠진듯한 나의 표정을 보자 물리적 행사(acto fisico)는 저지르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이런 경우에는 성미가 고약한(?)선생님은 학생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리는 것이 기본 예의였다. 그리고 아무리 마음씨 착한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최소한도 출석부로 학생의 머리통을 서너 차례 때리는게 교사로서 일종의 의무였다. 그런데 50대 후반의 국어 선생님은 내 뺨을 때리지도 않았고, 또한 출석부로 머리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내 귀 한쪽을 부드럽게 땡기면서

“너, 철학하니?”

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물론 선생님의 그런 물음 속에는 ‘너, 정신이 어떻게 된게 아니니?’라는 뜻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그만큼 나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음울한 기운이 안면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당시 나의 심경은 얼굴 표정만큼이나 잔뜩 시꺼먼 구름 속에 파묻혀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se continu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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